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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병훈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55집
발행연도
2024.11
수록면
85 - 11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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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지역 토착세력은 서산류씨를 제외하고는 크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서산을 대표하는 가문들은 대부분 외부에서 들어온 성씨들이었다. 입향 시기는 고려말에서부터 조선후기까지 다양하였다. 경주김씨는 안주목사를 역임한 김연<sub>⾦堧</sub>이 명종대 입향한 이래로 김호윤이 서산 음암면 지역에 터를 잡으면서 세거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임란 의병과 대민 구제 활동을 펼치며 재지적 기반을 강화했다. 특히 김적-김홍욱 부자대에 사회적·정치적 기반을 확충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실과의 혼인까지 이어지면서 18세기 이래로 대표적 벌열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서산 경주김씨의 현조인 김홍욱의 신원과 추증이 이어지던 시기에 그를 제향하는 성암서원이 건립되었다. 이때 서산류씨 류숙을 함께 제향하였는데, 서산의 토성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서산에 광범하게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산지역 사림들은 서원 건립과 함께 사액을 청원하여 1721년(경종 1) 사액을 받게 되었다. 즉 성암서원 건립과 사액은 경주김씨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향촌 내 후손들의 위상이 동시에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성암서원은 조령에 의해 훼철과 복설을 반복하기도 했다. 한편 김홍욱의 부친 김적 역시 사림들의 공의에 의해 서산 송곡사에 1797년(정조 21) 제향 되었다. 이 역시 서산지역에 형성된 후손들의 가문적 기반과 경주김씨의 중앙에서의 권력이 고려된 것이었다. 송곡사의 입장에서는 김적의 추향으로 서산지역 토성이 주도하던 사우의 운영을 탈피하고, 척족가문의 가담으로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서산지역 경주김씨의 성장
3. 경주김씨의 서원 건립과 향촌 내 위상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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