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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걸순 (충북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243 - 28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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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만(1876~1911)은 한말부터 망국에 이르는 시기에 국내는 물론 연해주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중요한 인물이다. 1906년 그는 이상설, 이동녕 등과 함께 망명하여 북간도에서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여 운영하다가, 헤이그 특사 파견 지원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이래 사거할 때까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자금 모금을 통해 헤이그 특사 사행을 지원하였고, 海潮新聞을 창간하여 주간·주필·총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논설을 통해 냉혹한 사회진화론적 국제질서를 이겨나가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초빙해 온 장지연과 극심한 불화 관계가 조성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공립협회에도 참여하여 국민회 지회장에 피선되는 등 미주 동포사회와 연계를 맺으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뒤 이어 창간된 大東共報에도 주필로 참여하였다. 당시 정순만은 同義會라는 비밀결사에 안중근과 함께 참여하였는데, 이를 배경으로 안중근의거를 계획하고, 의거후에도 안중근의 변호에 힘을 쏟았다. 이는 그가 민족운동을 위해서는 대립되는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할 수 있다는 독립운동 이념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해주 한인사회의 분파와 파쟁은 조국 독립을 위한 그의 꿈을 접게 만들고 말았다. 그는 연해주에서 ‘정순만파’나 기호파(경성파)의 수장으로 성장하였으나, 자신이 연해주 한인사회로부터 신망을 잃었다고 여긴데다 민회에서 서북파에게 밀린 나머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1910년 1월 23일 양성춘을 사살하는 ‘양성춘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우발적 상황에서 오발에 의해 발생한 사고였으나, 이를 둘러싸고 제기된 각종의 설은 복잡다기한 한인 사회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양성춘의 형 양덕춘과 미망인의 개인적 복수 참극을 일으켰고, 결국 출옥 후 의병투쟁 등 재기를 도모하던 정순만은 1911년 6월 21일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정순만의 36년 일생은 민족운동 시기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즉, 국권회복을 다방면으로 모색한 모범적 측면과 아울러, 지역적 파쟁과 개인의 격정을 관용하지 못한 편협성은 반성하여 마땅한 것이다. 그는 민족운동 시기의 지역적 분파와 파쟁이 가져온 가해자요 피해자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결국 연해주 한인사회의 반성과 단합을 촉구하여 권업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목차

1. 머리말
2. 정순만의 민족운동
3.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피살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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