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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세형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15집
발행연도
2015.3
수록면
75 - 106 (32page)
DOI
10.21208/kla.2015.03.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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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는 역사상 명청교체기에 해당한다. 요동에서 일어난 후금은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중원을 장악하게 되었다. 1621년부터 1637년까지는 육로사행길이 막혀 해로사행으로 바뀌었다. 명은 1644년 결국 망하였지만 명의 말기적 증세는 17세기 초반의 사행록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고는 명나라 말기의 위기상황을 최현의 <朝天日錄>(1608년)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이외에도 보충자료로 김중청의 <朝天日錄>(1614년), 조즙의 <癸亥水路朝天錄>(1623년), 이덕형의 <朝天錄>과 홍익한의 <朝天航海錄>(1624년), 김육의 <朝京日錄>(1637년) 등을 활용하였다.
2에서는 ‘中華秩序의 당위성과 기대’에 대해 살폈다. 중화질서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 즉 華夷觀을 바탕으로 ‘책봉-조공’ 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중화질서는 무력이 아니라 禮敎를 매개로 유지되는 질서이다. 17세기 명이 현실적으로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조선 성리학자들은 중화질서를 신봉하고 이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
3에서는 17세기 사행록에 나타난 ‘명나라 말기의 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폈다.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禮敎가 쇠퇴하고 異敎가 성행하였다. 둘째, 大小官員의 貪風이 성행하였고 환관이 국정을 전횡하였다. 셋째, 군사방비가 허술하였고 잦은 오랑캐의 침입이 있었다. 넷째, 당파싸움이 심했고 국고탕갈로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中華秩序의 당위성과 기대
3. 명나라 말기의 위기 상황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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