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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규익 (숭실대학교)
저널정보
우리문학회 우리문학연구 우리文學硏究 제49집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87 - 127 (41page)
DOI
/10.20864/.2016.01.4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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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의공주혼전대향악장」은 우리 왕조 역사상 역대 왕을 제외한 개인 추모의 독립악장으로는 첫 사례였고, 향후 아악악장 제작의 방법이나 관행의 모델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모범적 선례이기도 했다. 고려의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의 임신을 계기로 1차 사면령을 내렸고, 난산으로 인해 위중해지면서 다시 사면령을 내릴 정도로 공주의 안전한 해산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결국 공주가 죽자 능을 호화롭게 꾸며 장사지냈고, 즉위 16년에 호화롭게 지은 혼전에서 제사를 올리며 「휘의공주악장」을 사용했다. 휘의공주의 죽음을 계기로 개혁군주 공민왕은 실의에 빠졌고 국정은 파탄으로 접어들었으나, 「휘의공주악장」을 새로 지은 점은 우리나라 예악정치의 통시적 선상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국가의 제례악장을 중국에서 도입한 아악악장의 체례에 맞춘 것은 일종의 국제적 표준성을 확보하고자 한 의도에서 나온 결과였다. 동아시아적 보편성의 추구야말로 우리의 예악 시스템을 한 차원 높이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발판이기도 했다. 원나라 왕족 출신의 휘의공주는 공민왕의 충실한 정치적 후원자 역할을 했고, 공민왕의 개혁적 시도는 공주의 후원 덕분에 상당부분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원나라 출신 왕비들과 휘의공주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휘의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 휘의공주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 슬픔을 국가적 전례의 중요한 부분으로 확대시키고자 한 공민왕의 무리수는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 자체가 많은 제례악장들을 포함한 역대 왕조 악장들의 집성이면서 그 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 의해 악장 텍스트의 구절이나 내용으로 수용된 『시경』의 시구들을 이곳저곳에서 따다가 재조립하여 「휘의공주악장」을 만든 것도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구현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반영된 일이었다. 「휘의공주악장」의 <초헌악장>, <아헌악장>, <삼헌악장>, <사헌악장>, <오헌악장>, <종헌악장> 등 각 악장의 거의 모든 구절들은 『시경』 시들로부터 따온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휘의공주악장」은 결국 비슷한 시기에 개작된 「태묘악장」과 함께 조선조 아악악장의 모범적 선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휘의공주악장」텍스트와 『시경』 시 구절들
Ⅲ. 「휘의공주악장」의 동아시아적 보편성
Ⅳ.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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