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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흥권 (강원대학교)
저널정보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48집
발행연도
2016.3
수록면
227 - 25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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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을 통일한 康熙帝는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이북의 1천여리에 달하는 지역에 대해 ‘封禁’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청 말기 조선인들은 간도지역에 많은 토지를 개간하고 있었으며 청은 봉금을 해제하고 본격적으로 “移民實邊”정책을 실시하였다. 동북지역개발을 위해 청은 山東지역 漢人을 동북으로 이주시켰으나 대부분의 산동주민들은 요동지역에 정착하여 개발을 하였고 간도지역까지는 소수의 漢人들만 이주하였다. 반대로 이민실변은 조선인의 이주와 정착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漢人의 이주 실패로 청은 조선인의 거주를 인정하고 세금의 징수, 호적의 정리, 범죄사건에 대해 직접 다스릴 것을 조선에 통보했다. 그 후 청은 조선인에 대한 귀화입적의 강요와 薙髮易服정책을 실시하자 현지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에 조․청 양국은 국경문제로 두차례의 회담을 진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01년 조선은 회령에 邊界警務署를 설치하여 간도지역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였다. 1902년 5월 조선은 간도에 대한 호적조사를 위해 이범윤을 間島視察使로 임명하였고, 1903년에는 間島管理使로 임명해 간도주민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범윤은 조선인 호구를 조사함과 동시에 조선인의 보호를 적극 주장하였다. 이범윤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 수는 1903년 5월까지 27,400여 호에 남녀 10만여 구였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이범윤은 간도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私砲隊를 조직하였으며 청과 빈번한 충돌이 발생하였다. 조․청 양국은 간도문제와 조선인 관할권을 갖고 치열한 대립을 형성하였다.
그간 이범윤에 대한 연구는 초보적인 단계에 있으며, 본 논문으로는 이범윤을 조명하는 데 있어 한계가 있다. 하지만 앞으로 연해주에서의 활동까지 고찰된다면 이범윤에 대한 보다 진전된 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청의 간도 정책과 조선인 이주
3. 이범윤의 간도파견과 청에 대한 대응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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