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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양훈 (대성동고분박물관)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0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203 - 240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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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삼한시대 변한 ‘國’의 형성과 발전을 『三國志』 「魏書東夷傳」과 다호리 유적을 검토하여 복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우선 ‘國’ 형성초기의 ‘국읍’을 ‘國’과 비슷함을 전제하여 다호리 유적의 자료를 검토한 바 다호리유적의 목관묘 군집화, 수장의 존재 및 계승성, 구성원의 계층분화 양상, 대외교섭 양상 등이 도출됨에 따라 동읍-진영분지 일대는 국읍에 준하는 정치체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전반, 유이민세력인 ‘다호리집단’은 동읍-진영분지의 지석묘집단에 편입하면서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다호리집단’은 청동기, 철기의 보유 및 사용을 통해 재지집단인 지석묘집단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이에 앞서 청동기와 철기를 수입하기 위해 ‘다호리국읍’을 갖추어 대외세력과 교섭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1세기 후반 ‘다호리국읍’은 일부 최상위 계층의 경제적인 부의 독점현상과 계층 간의 격차가 뚜렷해지면서 정치 ·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1호묘 피장자는 ‘다호리국읍’의 최고수장이며, 동북아 정세변동을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한군현 등 대외세력과의 교섭을 장악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정치적 · 경제적 · 제의적 권위를 독점하였다.
기원전후 ‘다호리국읍’은 주변세력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면서 구야국에 결국 복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다호리국읍’이 한군현의 교섭루트 및 교섭방법의 다각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國’의 형성
Ⅲ. ‘國’의 성쇠과정과 배경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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