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육구연이 강학활동에 대해 살펴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남송시기의 학자들은 '精舍'나 '書院' 중심으로 성인의 道를 전하고 자신의 학문적 관점을 견고하게 다지며 문호를 형성해 나갔는데, 呂祖謙이 강학을 펼쳤던 麗澤書院과 張의 岳麓書院, 주희의 白鹿洞書院, 육구연의 象山精舍 등이 그 사례다. 상산정사는 육구연이 年에 朝廷에서의 관직생활을 접고 貴溪에 자리하고 있는 應天山에 올라 精舍를 짓고 자신의 철학을 후학들에게 전한 장소로, 그는 이곳에서 心學의 틀을 보다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사실 육구연이 강학활동을 펼친 시기는 이밖에 두 번이 더 있다. 34세에 省試에 급제한 후 臨安에서 강학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고, 그 후 金溪로 돌아와 44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집안의 동편에 있던 槐堂에서 10여 년간 강학활동을 한 것이 그 두 번째다. 특히 槐堂강학시기에는 중국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학술모임인 아호모임과 백록동강의가 있었던 시기이며, 楊簡과 哀燮舒璘傅子雲 등과 같은 걸출한 제자를 배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은 육구연이 淳熙 元年(1174) 臨安에 가서 靖安縣 主簿를 제수 받았고, 또 순희 6년(1179) 崇安縣 主簿로 조정되었다는 연보의 기록에 의거해, 이 시기에 관직생활을 하였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行狀이나 어류, 주희의 편지글 등의 관련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이 시기에 육구연은 관직생활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저 관직의 명을 받고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거의 槐堂에서 강학활동에 힘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순희 9년(1183)부터 시작한 朝廷에서의 관직생활 4년과 荊門에서 1년 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강학활동에 전념한 것이다.그의 강학활동은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육구연은 강제성을 지닌 學規나 외재하는 법도에 의존하지 않고, 학생 스스로의 자율성을 중시하였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본심'은 무엇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늘 때에 맞게 행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그것에 따라 행한다면 굳이 규율과 같은 강제적 방식이 필요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글쓰기와 같은 마음 밖의 공부에 너무 힘쓰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핵심처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변화시켰다. 둘째, 독서를 중시하지 않았다. 상산정사에서 강학할 때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이나, 槐堂에서 禮記의 글자해석 보다는 九容에 힘써야 함을 말한 것, 臨安에서 본심의 발현을 강조한 것 등은 모두 경전의 해석보다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곳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육구연이 독서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상산정사에서 맹자의 고자편을 읽으라고 한 것 등은, 책이 모두 내 마음을 주석한 것이므로 본심을 세우고 확충하는 방편으로 읽어도 됨을 인정한 것이다. 셋째, 강학의 목표는 누구나 성인됨에 있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험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良知와 바름을 행할 수 있는 良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저 이 마음을 바로 세우고 부단히 행하는 자는 누구나 성인의 경지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宋元學案에서 象山學案과 더불어 槐堂諸儒學案을 별도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가 一身의 安逸만을 위한 삶이 아닌 聖學에 뜻을 두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힘썼던 강학활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