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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광운 (북한대학원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8집
발행연도
2019.11
수록면
265 - 308 (44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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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광복 이후 활동 특히 1948년 4월 이후 평양에서의 행적은 대체로 누군가의 전언을 근거로 복원했기 때문에 문헌 자료 등의 보완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당시 공간된 신문 등을 이용하여 그의 해방 후 행적을 조사하고, 그 성격과 의의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현대사에서 ‘민족 대 반민족’, ‘좌익 대 우익‘ 대립구도에서 중간파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가능성과 한계를 가름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원봉이 귀국한 시점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인민전선’ 구축과 ‘국민전선’ 결성으로 정치세력들이 정면충돌하던 때였다. 그는 임시정부 대표로서 대중들의 전국 조직 결성에 참가하며 민족통일전선체 결성에 노력했지만, 임시정부가 추진한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미군정 자문행정기구로 변질되자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김원봉은 민전 의장으로 3상회의 결정 지지, 좌우합작 및 미소공위 참여를 통해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견제와 방해를 받으면서도 독자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경찰에 의해 폭행과 구금, 테러 위협까지 커져가던 상황에서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였다.
김원봉은 미군정과 이승만세력 등을 비판하며 민전역량을 키우고자 했지만, 3당합동이 표류되면서 민전은 더 취약해졌다. 미소공위 협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희망도 1947년을 지나며 실패하였다. 이제 할수 있는 일은 남북민족역량을 결집시켜 통일·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결국 그는 서울을 떠났다.
김원봉은 평양에서 자신을 “정치를 한다는 사람”으로 이해했고, 인민공화국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공화당 소속 20명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 또는 인민공화당 위원장, 남조선민전 의장으로서 인민정권 강화와 ‘국토완정’을 위해 일했다.
전쟁시기 김원봉은 농업 증산 등 후방사업에 헌신하였고, 1952년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인민공화당 위원장과 조국전선 의장단 성원으로서 전시생산과 전후 복구사업 등에 앞장섰으며, ‘박헌영사건’ 이후 오히려 대외역할도 더 커졌다. 그런데 과거 임정 요인 중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평양에서 만들어지면서 김원봉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직무에 충실하며 관료로서 살다가, 1958년 조선로동당에 의해 “나쁜 놈”으로 낙인찍혀 쫓겨났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활동과 행적은 ‘통일·독립’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평양에서도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조선체제에 복무하며 점차 정치활동가로부터 행정관료로 살다가 1950년대 후반 변화된 현실에서 더 이상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목차

1. 들어가면서
2. 서울에서의 정치 활동과 성격
3. 평양에서의 행적과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참고문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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