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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희 (Ankara Üniversitesi Tarih Ortaçağ)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70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251 - 28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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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조(Ottoman Empire)는 아나돌루 북서부 해안지역에서 오스만 가지(Osman Gazi: 1281-1326)에 의해서 건국되었다. 이후 오르한 가지(Orhan Gazi:1326-1360)에 들어서 슐레이만 파샤(Süleyman Paşa)가 루멜리(Rumeli)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오스만조가 루멜리로 진출하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십자군을 결성하여 대항한다. 무라드 1세(MuradⅠ:1360-1389)는 1389년 유럽의 십자군을 코소보전투(Battle of Kosovo)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위협을 제거하게 된다. 코소보 전투에서 무라드 1세가 사망하고 바예지드 1세(BayezidⅠ:1389-1402)는 오스만조의 술탄에 즉위하게 된다. 바예지드의 별칭인 ‘Yıldırım’에서 알 수 있듯이 저돌적인 정복전쟁으로 오스만조의 영토를 확장시키게 된다. 오스만조는 점령지를 통치할 때 원격지배 구조를 취하였다. 점령지 지도자들의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세금을 원하였고, 군사원정시 군대와 군비를 조달하게 하였다. 하지만 바예지드는 점령지를 직접통치 형태로 변화 시킨다. 그는 정복지를 점령하면 지도자들의 지배권을 철저히 배제하고, 정복지를 자신의 가신들과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후트베(Hutbe)를 낭독하게 하였고, 동전을 주조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오스만조가 아나돌루 투르크 연맹체의 맹주가 아닌 제국의 지도자로서 변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정치구조의 변화는 아나돌루 공국들(Anadolu beylikleri)의 지도자들의 반발을 가져왔고,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에 저항하거나 도주하였다. 바예지드 시기 영토가 확장되었으며, 동부 아나돌루 지역을 두고 티무르(Timur)의 티무르조와 대립하게 된다. 동부 아나돌루 지역의 에라트나 공국(Eratna Beylikleri)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혼란은 두 제국의 지도자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바예지드는 시바스(Sivas)를 장악하였고, 티무르 역시 동부 아나돌루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두 지도자는 서로에게 서신을 보내 비난하며, 전쟁을 책임을 서로에게 물었다. 바예지드는 티무르를 ‘늙은 개’, 불신자, 이교도로 비난하였고, 티무르 역시 바예지드를 불신자, 이교도, 비열한 지도자로 비난하였다. 두 지도자는 1402년 앙카라 전투를 벌이게 된다. 바예지드는 티무르와 전투를 벌였고, 바예지드가 패배하게 된다.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나돌루에서 징집된 병사들이 전쟁을 이탈하였기 때문이다. 아나돌루 병사들은 자신의 지도자의 깃발이 티무르 군영에서 발견하게 되자 티무르에게 투항하여 전장을 이탈하였다. 이 때문에 오스만조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오스만조는 전쟁에 패배하게 된다. 바예지드는 티무르의 포로가 되었고, 티무르는 전투에서 승리하여 아나돌루에 오스만조의 지배력을 붕괴 시킨다. 티무르는 아나돌루 공국들을 부활시켰다. 카라만공국(Karamanoğulları), 멘테셰공국(Menteşeoğulları), 게르미얀공국(Germiyanoğulları), 하미드공국(Hamidoğulları), 사루한공국(Saruhanoğulları) 이 재건된다. 공후들은 티무르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예단과 예물을 헌상하였다. 티무르는 여러 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티무르의 승리를 축하하는 여러 나라들의 사절들이 군영으로 몰려왔다. 바예지드의 아들들도 티무르에게 헌상하며 그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티무르는 아나돌루를 횡단하며 자신의 지배질서를 세우고 사마르칸트로 귀환한다. 앙카라 전투는 단순히 오스만조와 티무르조가 동부 아나돌루 지역의 패권을 두고 벌인 전투이다. 하지만 전투의 결과는 세계사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조는 앙카라 전투에 패하면서 바예지드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술탄 자리를 두고 바예지드 아들들이 10년간의 내전을 벌이게 된다. 내전은 메흐메드 1세의해 종식되었다. 그리고 무라드 2세가 즉위하는 1421년 이후에야 아나돌루 공국들을 제압하고,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수명이 연장되었다. 바예지드는 제위기간동안 여러 차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을 벌였다. 하지만 앙카라 전투로 오스만조가 쇠퇴하고, 내전을 벌이게 된다. 이 때문에 반사 이익으로 비잔틴 제국의 수명이 연장된다. 비잔틴 제국은 메흐메드 2세가 즉위한 이후 1453년 멸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조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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