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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橋本義則 (日本 山口大學) 김은정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백제연구 제66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 - 19 (1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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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에서 宮都는 7세기 말 ‘藤原’京에서 시작되었다. ‘藤原’京에 천황에게 봉사하기 위해 수많은 관인들이 거주함에 따라 다양하고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관인들의 사후 이들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자 관인들은 宮都의 주민으로 취급되어 이들을 매장하기 위한 새로운 葬地가 궁도에 설치되었다. 8세기에 들어와 宮都는 ‘藤原’京에서 平城京, 恭仁京, 甲賀宮으로 바뀌었고, 다시 平城京으로 환도한 이후에 長岡京, 平安京으로 천도했다. 이렇게 宮都가 그 소재지를 달리할 때마다 宮都에 거주했던 관인들은 당연히 거처를 옮겨야 했고, 이로 인해 이들이 사후 매장될 葬地도 함께 이동되었다. 그런데 8세기 말 平安京으로 천도를 단행한 이후 더 이상 宮都를 옮기지 않게 되자 宮都에 설치된 葬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즉, 종래 귀족 부부의 묘는 멀리 떨어진 다른 郡에 조성되었으나, 환무천황(桓武天皇)이 藤原百川의 묘를 아내의 묘가 있는 곳으로 이장시킨 이후에는 同郡 同鄕(공역묘, 同穴墓 등)인 곳, 同郡 隣鄕인 곳, 異郡 隣鄕인 곳에 조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환무천황이 중국적인 사상, 유교의 예제를 수용한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종래 형식적이고 표면적으로 유교와 예제를 수용했던 것과는 달리 본격적이고 내면적으로 수용하여 사회를 변혁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葬地의 형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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