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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주철희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저널정보
순천대학교 남도문화연구소 남도문화연구 남도문화연구 제28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67 - 9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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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지역의 ‘빨치산 탄생’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여순사건 그리고 14연대 병사들. 이들이 지리산에 입산하면서 남한지역의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14연대 출신 빨치산에 관해 알려진 인물이 없다. 여순사건이 발발하면서 ‘총지휘자’ 또는 ‘수괴’ 등으로 국군의 주요 검거 대상자였던 김지회와 홍순석. 그리고 1967년 이후 지창수 상사가 그나마 알려진 인물이다. 14연대는 대략 2,000~2,500명 정도 규모의 부대였다. 이 중 ‘봉기’에 합세하여 입산한 병사는 대략 1,000명 안팎으로 보인다. 이들 빨치산은 1948년에서부터 1955년까지 지리산?백운산?덕유산 등 전남?전북?경남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 글에서는 57사단 또는 불꽃사단 사령관으로 널리 알려진 이영회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영회를 주목한 것은 14연대 출신 빨치산 중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남한지역 빨치산의 탄생과 종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의 활동은 지리산 빨치산과 남로당과의 관계를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회의 빨치산 활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독자적?자생적 투쟁을 했다는 것이다. 이영회가 독선적이며 당의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지탄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으로 투쟁을 고집했던 것을 명확하게 해명할 수 없다. 다만, 이영회가 남로당에 적극적인 자세나 협력을 취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14연대 출신 모든 빨치산의 특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영회는 기동투쟁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세력이 약화할수록 보급투쟁 등 소규모 투쟁으로 생존 방법을 찾는 것이 게릴라전의 특성이지만 이영회는 기동투쟁을 고집했다. 1953년 11월 27일 이영회의 사살로 인하여 지리산 빨치산은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여순사건으로 시작된 남한지역 빨치산의 ‘탄생’은 이들이 사살되면서 ‘소멸’하였다. 그중에 이영회는 지리산에서 최후까지 격렬하게 투쟁한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데 이 글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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