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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邊東明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22호
발행연도
2006.2
수록면
9 - 58 (5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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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양산 성황신 김인훈과 밀양 성황신 손긍훈을 소재로 한 사례연구이다. 김인훈은 낙향귀족의 후예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하여 양산을 지배한 호족이었다. 반면에 손긍훈은 6두품계 촌주 출신의 吏로서 농토와 농민의 집적을 통해 밀양을 지배한 호족이었다. 둘 가운데 경상 동남부지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선 것은 김인훈이 먼저였다. 州治를 거점으로 삼은 위에 해상활동을 통해 일찍부터 弓裔ㆍ王建과도 손을 잡은 결과였다. 손긍훈은 고려왕조 개창 이후 그러한 김인훈의 영향 속에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후삼국시기 이들은 친왕건적 내지 친고려적 입장에 선 호족들이였다. 그리고 이들의 그와 같은 활동은, 장차 그 후예들로 하여금 고려왕조 치하에서 중앙에 진출하거나 혹은 지역의 유력자로 군림할 수 있도록 발판이 되었다. 후일 그 후손을 포함한 지역 토호세력이 이들을 신격화하여 고을의 상징인 성황신으로 추앙했던 것은 이에 말미암은 일이었다.
두 사람 중 먼저 성황신으로 추앙된 것은 김인훈이었다. 김인훈이 웅거하던 양산은 본시 경상 동남부의 중심 고을이었다. 그런데 고려초 慶州의 관할을 받는 일개 郡으로 격하되었다. 그러자 梁山人들이 김인훈을 고을의 상징인 성황신으로 떠받듦으로써, 고려왕조에 기여한 그를 앞세워 중심 고을로서의 위상을 되찾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현종대 무렵의 일이었다. 손긍훈이 밀양의 성황신으로 추앙된 것은, 12세기말~13세기초의 어느 때였다. 농민ㆍ천민의 봉기가 빈발하던 혼란기를 맞아, 손긍훈에 의지하여 고을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하던 토착 유력계층에 의해서였다. 한편 양산과 밀양의 성황신 김인훈과 손긍훈은 조선왕조 들어 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사회의 儒敎化와 함께 전통적인 성황신앙이 淫祀로 지목된 탓이었다.

목차

〈국문 초록〉
1. 머리말
2. 金忍訓ㆍ孫兢訓의 출신과 활동
3. 金忍訓ㆍ孫兢訓의 梁山ㆍ密陽 성황신 추앙
4. 朝鮮 儒敎社會와 梁山ㆍ密陽의 城隍神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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