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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문재숙 (이화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악교육학회 국악교육 국악교육 제44집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67 - 112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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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미 『고대 가야금연구』,『고려시대 가야금 연구』,『조선시대 가야금 연구』를 발표하였으며, 본고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가야금이 언제부터 어떻게 우리 민족과 함께하였는지 총체적인 연구의 마지막 논문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새로운 변화인 근대화의 발단이 되긴하였지만, 조선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에 의해 이뤄진 근대화가 아니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 압력을 가했던 근대화였다. 따라서 이로 말미암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 정치, 사회, 경제가 변화함에 따라 문화가 변하고 따라서 음악에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갑오경장 다음해인 1895년 사회가 혼란에 빠져 궁궐 내에서는 한 때 음악행위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다른 궁 밖에서는 8명창에 이은 근대 5명창들의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가야금산조에 이은 거문고, 대금 등의 산조가 탄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산조의 틀을 완성한 김창조(金昌祖: 1865~1919)는 풍류의 대가였기 때문에, 풍류의 만·중·삭(慢中數)의 형식은 그대로 산조의 형식이 되었다. 산조의 창시자 이전에 풍류의 대가였던 감창조는 그의 수제자 한성기(韓成基: 1899~1950) 그리고 그의 손녀 김죽파(金竹坡: 1911~1989)로 전승할 수 있게 하였다. 월북한 김창조의 제자인 안기옥(安基玉: 1894~1974), 정남희(丁南希: 1905~1984)에 의해 북한에서도 일부 민간풍류가 전승되기도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1910년부터 1945년 일제 강점기(1910~1945)와 해방공간(1945~1948)부터 현재까지로 시대를 구분하여 가야금 관련 악보 및 명인을 중심으로 조사 연구하여, 나라가 일본에 의해 국권을 잃고 식민지화 되는 비극 속에서도 가야금은 그 시대의 아픔을 어떻게 담아내었는지, 우리 민족과 어떻게 함께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일제 강점기 국운(國運)이 기울고 암울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교, 가야금산조가 창조되어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음악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노골적인 일제의 탄압은 우리민족의 깊은 아픔이었는데, 이를 산조 특유의 계면조에서 나타나는 진계면으로 슬픔을 승화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즉, 풍류 속에 없는 계면조 산조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계면조 속에 담아 산조 속에 슬픔을 슬픈노래로 표현하여 그 시대 민중들의 아픔을 달래주었기 때문에, 이것이 민중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 같다. 이는 고려시대 무인정권 시대에 문인들이 오히려 활발하게 문학에 전념하여 그들의 억눌러진 정서, 분노 등을 문학으로 표출하면서 달랬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노래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향가가 성행했었던 신라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설이 빠지면서 삼현삼죽(三絃三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악합주곡이 탄생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가곡을 중심으로 한 성악곡 악보가 중심이었는데 1910년 이후에는 가곡에서 시설만 빠진 기악곡인〈갖은 영산회상〉을 중심으로 한 악보가 주를 이루었다.
판소리가 숙종시대에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漫畵集)에서 시작하여 8명창, 5명창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연이어서 기악곡인 가야금산조가 나타나 사설 없는 판소리인 기악곡 가야금 산조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또한 비슷한 맥락임을 알 수 있다.
판소리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구한말 일제 강점기 때 김창조에 의해서 음악적인 틀이 완성되어 가야금 산조가 그 시대의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이 역시 성악곡이 한 시대를 풍미한 뒤에 사설이 빠진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기악곡을 탄생시킨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제1세대 명인인 감창조는 주사(主事), 한숙구는 선달(先達), 박팔괘는 어전광대로써 정6품의 벼슬을 받았다. 제1세대는 가야금산조 명인들은 어전광대로서 활동을 많이 했고, 왕가(王家)가 몰락하면서, 가야금 산조는 이완용(李完用: 1858~1926) 같은 상류 특수층에게 사랑받았고 한편으로는 급속도로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이에 더해 음반이 발매되고, 극장이 생기고, 협률사 등 악극단이 생기면서 이러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음악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극장, 음반의 확산, 협률사 등 악극단들의 활발한 활동 등은 일제 강점기의 부당한 핍박과 설움을 승화시키는 통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일부 상류층만 즐길 수 있었던 가야금 음악이 음반을 통하여 또는 악극단의 활동을 통하여 도 경성방송국 등 방송국을 통하여 급격하게 대중들 속으로 퍼져나갔다.

가야금은 이천여 년 전 금관가야, 대가야에서 만들어져서 현재까지 우리나라 민족이 그 시대마다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했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현악기로 항상 우리민족 곁에 항상 함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가야금
Ⅲ. 해방공간(1945~1948)부터 현재의 가야금
Ⅳ. 결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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