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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동방학지 동방학지 제17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31 - 16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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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 방면의 『세설신어』 독자층에 대한 연구 성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여된 중국방면의 독자층 형성에 대한 이해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15세기 말~16세기 초 명대 효종 홍치년간(1488-1505)에 오중문인(현 강소성 소주 일대)에 의해 제작된 인물지를 통해, 명대 『세설신어』 독자 형성의 사회문화적 맥락 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다. 필자는 16세기 『세설신어』 수용 계보가 오중문인에 집중된 점에 주의하였다. 그간 중문학계에서 명대 중엽 독자들의 다양한 수용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처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글은 관련 논의 범위를 전체 ‘오중문화권’으로 확장시킴으로써 선행연구와 차별을 두고, 독자 형성의 원류를 고찰하기 위해 15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오중문인’이란, 축윤명(祝允明),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서정경(徐禎卿), 도목(都穆), 양순길(楊循吉) 등이 중심이 되어 함께 고문사(古文詞)를 제창했던 맹우들을 가리킨다. 오중 인물지는 바로 맹우들에 대한 인물품평과 상찬(賞讚)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의 상호 ‘표방(標榜)’과 ‘상찬’에서 드러난 인물관은 위진명사 및 『세설신어』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접속과 변주를 보여주었다. 이 글은 바로 고금(古今)의 접속 지점이 장기간 온축을 거쳐 명대 중엽에 『세설신어』가 재등장하고 독자층을 형성하게 된 핵심 관건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오중인물지와 『세설신어』 혹은 오중문인과 위진명사를 비교,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첫째, 오중인물지와 『세설신어』의 인물에 대한 글쓰기가 모두 심미적이나, 오중문인의 경우 한말(漢末) 청류(淸流)와는 달리 고문사(古文詞)와 시문(時文)과의 대립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그들의 인물관을 청아박고(淸雅博古)에 대한 숭상으로 틀지웠다. 둘째, 은일이나 탈속적인 삶에 대한 동경은 고금 상호간에 접속점을 가졌으나, 위진명사는 현원(玄遠)한 정신적 경지를, 오중문인은 박아군자(博雅君子)에 대한 숭상으로 변주되어 나타났다. 셋째, 오중문인의 ‘광사(狂士)’에 대한 긍정은 『세설신어』의 「임탄(任誕)」편과 접점을 이루었다. 특히 『오군이과지(吳郡二科志)』에서 「광간(狂簡)」 편목의 설정은, 중용의 덕과 명교(名敎)를 중시하는 명대 사회에서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명성을 생산하고 공인하는 메커니즘의 주도권이 중앙에서 지방의 지역문단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글은 국내에서 진행된 기존 조선 방면의 연구성과와 더불어 16~17세기 한·중·일 동아시아의 『세설신어』 주요 독자층에 대한 심층 비교분석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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