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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澈雄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52號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31 - 50 (20page)
DOI
10.29334/MHSH.2019.12.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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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용인 서봉사지에 대한 발굴과 현오국사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서봉사의 연혁과 위상, 그리고 현오국사의 활동에 대해 재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 결과, 서봉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고 있어 고려시대 내내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명종 15년(1185)에 현오국사비가 세워지고 있어 서봉사의 높은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碑銘에 “大華嚴浮石寺住持贈諡玄悟國師”라고 하였으니 이때의 서봉사는 화엄종 사찰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봉사는 용인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그 위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태종 7년(1407)에 자복사로 지정되고 있어 서봉사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때의 서봉사는 천태종 소속이었다. 세종 6년(1424)에 천태종을 선종으로 통합하는 조처를 내렸으니 서봉사도 선종 소속이 되었을 것이다.
발굴 조사 결과, 서봉사의 연혁을 알 수 있는 몇 점의 명문이 확인되었다. ‘成化三年丁亥’(1467), ‘嘉靖三十二年’(1553), ‘崇禎’(1628~1644) 등의 출토 명문으로 보아 서봉사는 17세기 전반기까지 존속하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서봉사에서 佛書가 간행되었는데, 그 시기는 선조 9년(1576)에서 선조 34년(1601)까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조선중기에도 서봉사는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봉사는 『범우고』(1799)에 기록되어 있으나 『용인현읍지』(1872), 『용인군지』(1899)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를 통해 본다면 19세기 후반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오국사 종린(1127~1179)은 인종대에 출가하여 의종, 명종 시기에 걸쳐 활동하였다. 인종은 ‘大覺의 餘風’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여 원명국사 징엄에게 명하여 제자가 되도록 하였다. 왕실중심의 화엄종은 의천-징엄-종린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현오국사비가 서봉사에 세워진 이유는 문도들의 활약과 관련이 있다. 그의 비는 문도들의 요청에 의해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비의 음기에 “故瑞峯寺玄悟國師門徒”라고 하여 종린의 문인을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현오국사비가 서봉사에 세워진 이유는 그의 문도들이 서봉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봉사는 고려중기 이래 조선시대 말에 폐사될 때까지 용인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서봉사의 연혁
Ⅲ. 종린의 생애와 역할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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