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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영교 (중원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69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57 - 85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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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에는 金春秋가 654년 4월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日本書紀』에는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新羅王이 아니라 臣下인 伊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眞智王⋅眞平王⋅善德女王⋅眞德女王은 각각 즉위 원년에 上大等을 임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金春秋만 유독 즉위 2년(655) 正月에 그렇게 한 것으로 나와 있다. 武烈王의 踰年卽位(655년)가 남긴 사료상의 흔적으로 보이며, 『日本書紀』와 『三國史記』가 일부 일치․대응되는 부분이다. 654년 11월 경 金春秋가 伊湌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은 新羅 群臣들의 반대로 그의 왕위계승이 이루지지 않은 것을 반영한다. 金春秋는 무리한 즉위를 시도하지 않았다. 무력을 앞세운 그의 즉위는 毗曇의 亂과 같은 內亂의 재발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麗濟 두 나라가 분규의 소지를 안고 있는 新羅의 왕위 계승을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그해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新羅내정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654년 8월 이후 麗濟․靺鞨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으로 新羅의 33개성이 함락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金春秋를 왕으로 밀고 있었던 金庾信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고, 群臣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閼川도 왕경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왕위계승문제를 두고 新羅조정이 분열된 현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대세력들과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상태에서 그가 수도를 떠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내분이 외침에 대한 저항력을 갉아먹자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나서야 진실을 보게 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대외적 위기는 群臣들이 金春秋를 王位에 추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655년 正月에 金春秋는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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