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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광연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83호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227 - 251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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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가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明朗을 비롯한 당시 중앙 교단의 승려들이 신라 사회가 불교계에 요구하는 바를 훌륭하게 완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 明朗은 佛法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신라인들에게 심어 주었다. 사천왕사에서 행한 文豆婁法은 신라 최초의 국가 주도 밀교의례였지만, 의례 집행자인 명랑을 밀교승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진골귀족 출신의 명랑은 유학 기간(660년대 전후로 추정함) 동안 당에서 황실의 후원 아래 주류 불교를 수학하였을 것이다. 당시 당에서는 신유식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밀교의 수용도 본격적이었으니, 새로운 밀교문헌을 빈번하게 역출하였고 불상을 동반한 밀교의례도 설행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 밀교의례를 주관한 사람이 밀교승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측천의 요청을 받아 십일면관음도량을 설행한 法藏은, 전공이 화엄이었다. 밀교의례의 주관자가 밀교승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밀교승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8세기 전반의 신라에서도 밀교의례를 행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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