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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정원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58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281 - 361 (8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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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는 조선후기 博學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그의 박학적 면모는 30대 이후 보이는 고증학적 성향이 농후한 저술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덕무의 학문 성향은 청대고증학의 영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덕무는 20대 중반에 청대고증학자 黃宗羲를 접했고, 30대 전후하여 고증학자들의 서적을 열독하였으며, 30대 중반 이후의 저술에 적극 활용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덕무가 청대고증학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들로부터 영향 받았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덕무가 접한 청대고증학자는 黃宗羲, 顧炎武, 毛奇齡, 朱彛尊, 徐乾學으로, 이들은 청대 초기 고증학 형성기에 활동한 학자들이다. 청대고증학의 전성기에 활동한 戴震, 錢大昕, 章學成 등에 대한 언급은 그의 문집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덕무는 청대고증학 전체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고, 다만 청대 초기 고증학의 일부만을 접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이덕무는 청대고증학자 중 顧炎武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덕무가 열독한 서목과 인용한 내용을 통해 모기령, 주이준, 서건학 등의 영향도 적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학자들은 학문적 지향과 삶의 행적이 판이하다. 顧炎武가 대명의리를 지킨 절의의 인물이자 주자 학문을 옹호하는 측면이 강했던 반면, 毛奇齡은 청에 벼슬한 이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명의리를 지킨 인물을 논박하기까지 했으며, 주자를 철저히 비판한 반주자학자였다. 이덕무는 대명의리와 주자 옹호적 입장을 중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모기령과 주이준의 박학과 고증학적 학문방법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이덕무가 청대고증학을 수용함에 있어서 ‘치밀한 考據를 바탕으로 한 考證學的 학문방법’을 중요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유년시절부터 名物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考據?辨證을 중요시 하는 학문 자세를 지녔으며, 20대 시절에는 鄭樵와 馬端臨을 본받아 백과사전식 類書를 만들고자 기획하기도 했다. 이는 이덕무가 청대고증학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名物度數學에의 깊은 관심과 고거?변증하는 학문방법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덕무는 30대 전후하여 청대고증학을 수용하면서 특히 고증학적 학문방법에 깊은 공감을 보였는데, 이는 이덕무가 평소 지향하던 博學과 考據?辨證의 학문방법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덕무 학문의 고증학적 성향은 청대고증학의 수용만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타고난 꼼꼼함과 유년시절부터 지니고 있던 명물도수학에의 관심과 고거?변증을 좋아하던 성향이 청대고증학의 수용과 결합되어 나온 결과라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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