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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열상고전연구회 열상고전연구 열상고전연구 제6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69 - 20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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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7세기에 청과 러시아가 충돌한 흑룡강 유역에 거주하던 부족민들에 대해 서술하고, 청이 1644년 입관한 후에 만주지역의 북부 변경인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그들을 팔기의 일부로 조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러시아의 침입에 있었음을 논한다. 청은 누르하치 통치기인 1616년에 최초로 흑룡강 유역으로 원정한 이래, 홍 타이지 시기에 계속된 원정을 통해 흑룡강 유역을 복속시켜갔다. 17세기 중엽 청은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을 솔론, 흑룡강의 후르카, 동해의 후르카, 인다훈 타쿠라라 구룬 등으로 구분했다. 러시아는 이들을 다우르, 고굴리, 주체르, 골디, 길약 등으로 분류했다. 러시아는 1649년부터 하바로프의 지휘 하에 흑룡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부족민을 약탈했다. 청은 1652년 우잘라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대패한 후에 만주지역 변경에 대한 정책을 새로 수립했다. 청은 후르카 출신의 샤르후다를 닝구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부족민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닝구타 지휘관의 지위를 기존의 머이런 장긴에서 암반 장긴으로 승격시켜서 독자적이고 효율적인 지휘를 가능하게 했다. 이후 닝구타는 성경과 동등한 지위로 승격되어 부족민의 영역을 관할하는 변경의 중심이 되었으며, 1676년 닝구타장군의 주재지가 길림으로 이동한 후에는 길림의 보조도시로서 對러시아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청은 우잘라 전투 이후에 러시아와의 전투를 점차 유리하게 진행해갔다. 그 원인은 청이 부족민과의 관계를 강화하거나, 부족민을 청의 관할을 받는 군대로 조직하거나, 부족민을 이동시켜서 러시아군이 식량과 모피를 약탈할 대상을 없애버리는 등의 다양한 정책이 효과를 낳은 데 있었다. 강희 초기부터 청은 흑룡강 유역의 부족민에 대한 쟁탈전에서 러시아를 누르고 확실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부족민이 청에 복속되는 데 있어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지배력과 군사적 역량이 러시아보다 오래 되었고 강력했던 것이 큰 흡인력으로 작용했지만 경제적인 원인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약탈에 주력했던 러시아와 조공의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교역을 통해 부족민의 이익을 보장했던 청 사이에서 부족민은 청을 선택했다. 부족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우세한 전투력으로 러시아를 압박한 청은 마침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흑룡강 유역을 청의 지배영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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