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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춘호 (중국 惠州學院)
저널정보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논총 동북아역사논총 제76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159 - 209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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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중반 한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던 모용준은 당시 국내외적으로 맞닥뜨린 경제위기 · 기후환경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방을 떠나 하북으로의 진출을 결정한다. 이때가 바로 350년 2월이었다. 그 후 염위의 군주 염민을 생포하는 등 하북의 정세가 모용선비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던 352년 11월 그는 자신이 역운을 갖고 있다고 공언한 후 대연황제에 등극했으며, 그 이듬해 2월 수도를 계성으로 옮겼다. 이로써 연왕국의 국가형태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모용준은 계성에서 하북에 대한 효과적인 치리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국가의 일원적인 지배, 즉 과거 국가의 최고 권력을 종실세력과 나눠 가졌던 ‘분치’의 경향을 끝내고 그들의 진정한 주군임을 선언한 후 결국에는 ‘짐이 곧 국가’라는 대연제국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이는 사실 모용선비가 계성을 함락한 후 이곳에 하북진출의 전초기지를 두면서부터 시작하여 정식으로 천도할 때까지의 3년을 포함하고 이후 업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8년의 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이다. 이 시기는 하북으로 진출한 모용선비에게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이 시기를 ‘계성시대’로 명명하고 그 변화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모용준은 하북에서 향론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운 한인호강들을 제압 혹은 회유하여 통치기반을 확보해가야만 했으며, 이를 위해 모용종실이 군사정벌을, 한인사족이 무수지책을 각각 맡아 추진해갔다. 그런데 무수지책이 군사정벌에 비해 하북의 한인호강과 백성들에게 미칠 파급력은 자연히 클 수밖에 없었으며, 모용각 등의 통병장군이 지역 민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얻는 효과와 함께 이들의 귀항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사회혼란을 극복하면서 통치기반은 더욱 공고히 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계성시대에 귀항해 온 한인호강들 중 과반수 이상이 지방관에 임명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지역의 치리에 능했던(有事幹) 한인사족들을 지방관으로 등용하여 사회질서 회복에 힘썼다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연왕국(대연제국)의 관리로서 하북을 치리했을 때, 이 지역 백성들로부터 오히려 더 큰 환영을 받았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이들은 후조 혹은 염위의 관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적은 귀항한 후 모용준을 향해 대의로 천하를 얻을 것이며, 심지어 요 · 순 임금처럼 태평의 세상을 열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종족적인 정치원리를 초월하여 그의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면, 분명 한인호강이 모용선비를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하북이 연왕국(대연제국)의 새로운 정치 · 사회 · 문화 등의 중심지역으로 전환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357년 10월에 이르러 하북 전체와 하남의 일부 지역이 대연제국의 강역으로 편입되면서 약 8년에 걸친 모용선비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게 되었다.

목차

I. 머리말
II. 모용종실(慕容宗室)의 군사적 역할과 모용군권(慕容君權)과의 신관계
III. 한인사족(漢人士族)의 무수지책(撫綏之策)과 하북 지방관으로의 임명
IV. 한인호강(漢人豪强)의 귀항과 하북 정세의 신변화
V.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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