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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한문고전학회 漢文古典硏究 漢文古典硏究 제31권 제1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67 - 19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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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사신의 일행들이 북경에 갈 때 심양을 거쳐 산해관으로 가면서,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있었던 명청 교체기의 전쟁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 했다. 이곳 전투 현장과 연관을 지어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인물은 李士龍이다.  조선 병사 李士龍은 1641년 청나라 용병이 되어 금주성 전투에 참전했다가 희생된 사람이다. 전투를 하다가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총[精砲]에 총알을 비운 채 명나라 군사에게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숙종과 현종, 정조, 송시열, 남구만, 박지원, 홍대용, 이긍익 같은 사람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회자된다. 특이한 것은 이사룡은 송시열과 정조에 의해 춘추대의의 화신으로 까지 크게 부각된다는 점이다.  이사룡이 운명하고 나서, 죽음과 관련하여,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박지원은 이사룡이 중화사상에 빠져 청나라에 저항하다가 스스로 극단적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남인인 남구만과 이긍익은 조선 병사들이 명나라 군사들에게 총을 쏘려고 하지 않자, 청나라 측에서 이를 문제 삼아 이사룡을 희생양으로 처형했다고 기록하였다.  이사룡의 고사를 두고 빗어진 춘추대의는 이처럼 남인과 노론의 견해가 달랐다. 노론 쪽이 대의명분에 좀 더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숙종과 정조는 춘추대의를 강조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숙종 때에는 당쟁이 자주 발생하였고, 정조 때에는 천주교가 전래되어 남인을 중심으로 천주교도들이 늘어났고, 이에 대한 노론 벽파의 비난이 거세졌으며 정조가 노론의 문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금주성 전투의 전후 과정과 당시 조선 병사의 분위기, 이사룡이 처했던 상황을 근거로 하여 이사룡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살펴보려고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오랜 동안 이사룡이 춘추대의의 상징인물로 부각된 원인에 대하여서도 분석하려고 하였다.  숙종은 이사룡을 추증하고 후손에게 벼슬을 내렸으며, 정조도 후손에게 벼슬을 내렸다. 정조는 이들에게 묘지명을 써줄 정도로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는데, 이사룡을 이순신 장군에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 이후 이사룡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왕조가 쇠퇴기로 들어서자 국왕을 비롯하여 위정자들이 춘추대의에 대하여 집착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춘추대의는 조선 왕조의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국왕과 집권 세력들 사이에서 중요한 명분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사룡은 이런 시각에 의하여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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